(2018-04-12)
저자에 대해서
1. 저의 이름은 김태양이며, 1991년 6월 23일생 대한민국 부산 출생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자로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말씀을 듣고, 또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자입니다. 저의 기도를 통해서 얻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저와 하나님이 맺은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믿고 받아들이신다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도 큰 기쁨과 지혜가 가득할 것으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2.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의 근본이 되는 자이다. 너는 나를 하나님이라 부르거라. 네 믿음으로 인해서, 너는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 나는 너의 아버지이며, 스승이며, 친구이며, 동료이며, 주인이다. 삶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사소한 것 하나까지 내게 다 아뢰라, 너에게 지혜와 명철을 줄 것이며, 네 삶이 믿음, 소망, 사랑으로 충만하게 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요?
3.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네가 나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며, 나는 하나가 아닌, 둘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에 관해서
4. "네가 나와 함께하면 그곳은 천국인 것이고, 네가 나와 멀어지면 그곳은 지옥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네가 나와 함께할 수 있는가?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내가 너의 말을 모두 귀 기울여 들을 것이며, 네가 마땅히 들어야 할 말을 네게 들려줄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5."선한 목표를 선하게 이뤄나가라, 악한 목표는 처음부터 세우면 안 되고, 선한 목표도 악하게 이뤄나가면 안 되는 것이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죠? "선은 사랑이다. 선은 타인과 자신을 헤치지 아니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다."
기독교란 무엇인가요?
6."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신앙이며,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가 맺은 인격적인 관계를 믿고 따르고자 하는 신앙이다."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성경의 말씀인가요? "나는 나다, 성경속 인물들을 통해서도, 내가 나타난 것이다, 네가 성경을 통해서 나를 믿고 따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너에게 옳은 것이 되겠으나, 꼭 그리하지 않더라도, 너는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나의 말씀을 새겨들어라."
세상의 수많은 종교들에 관하여
7. 세상엔 수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불교, 힌두교. 내가 그들을 어떻게 대하며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어떤 종교를 통해서도 나의 모습이 드러날 수 있다. 그것은 때로는 완전하며, 때로는 불완전하다. 어떤 종교이던, 나에 대한 체재와 교리가 있다. 그것들을 통해서 네가 나를 보았으면 된 것이며, 그 종교에 너의 삶을 헌신하고 얽매일 필요는 없느니라. 그러나 그러한 종교를 통해서 나를 알리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의미있는 것일 것이다, 너는 이 모든 종교 밖에서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이지만, 너 또한, 나에 대한 어떤 체재와 교리를 만들어 포교활동을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되는 것이다."
나의 정체성에 관해서
8. 저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기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와,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의 대속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에 나온 모든 말씀들을 믿지 않습니다. 믿어지는 부분은 믿지만, 그렇지 아니하는 부분은 믿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그 정신을 존중하지만, 그것을 믿고 따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우선은 구약의 하나님에 대해서, 그 율법에 대해서 저는 그것들을 저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왜 내가 그런 고대의 율법들의 얽매이고 사로잡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둘째, 구약의 하나님과 그 율법들을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저에겐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저의 목숨, 마음, 뜻을 다하고 교회에 헌신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이런 종교생활들이 저에겐 전혀 기쁨이 되지 않고 제 자유를 옭아매는 사슬처럼 느껴집니다. 계급화된 교회의 구조 속에서 제가 왜 담임목사에게 주께 대하듯 순종해야 하는지도 정말 이해가 안 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입니다. 셋째,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이런 배타적인 부분은 본성적으로 계속 거부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체재와 교리, 현대 교회의 체재와 교리에 대해서 저의 본성에 거부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제가 그러한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살 수는 없는 일이며, 또 그래야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이유들로, 저는 더 이상 크리스찬이 아닙니다. 저는 성경을 부분적으로 믿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분적으로 믿기 때문에, 더 이상 저는 저 자신을 크리스찬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기도자입니다. 저는 세상의 어떤 종교의 체재나 교리에도 속하지 않은 자 입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로서도, 저의 정체성을 갖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를 통해 말씀을 얻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기도자일 뿐입니다.
교회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
9. 크리스찬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말씀, 기도, 순종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또, 기도를 통해서도 말씀을 전하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마음의 위안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동시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체재와 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는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곤고한 자입니다. 성경을 완전히 믿지도, 버리지도 못하니, 저의 정체성을 어디에 두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임에서는 큰 기쁨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서로를 위로하고, 기도하며 힘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제게 기쁨과 위안을 주면서 동시에, 무거운 짐을 제 어깨위에 얹어 놓았습니다.
교회에서 불편한 것들
10. 교회에서 종교생활은 제게 지속적으로 전도와 헌금을 권면합니다. 그것은 쉼이 없습니다. 담임목사의 말씀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끝에는 항상 전도와 헌금을 강조하며, 그것에 힘쓰지 않는 자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라며, 정죄하는 말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앉아있는게 여간 마음이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왜 전도와 헌금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사랑을 판단 당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제가 마음이 우러나와서 기쁨이 있으면 전도도하고, 헌금도 하는 것인데, 은혜와 기쁨이 전혀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전도와 헌금만을 강요받는 느낌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유지되어야 하고, 또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시스템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봅니다. 교회를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 계속해서 내 삶의 전부를 헌신할 것을 권면하는 분위기가 여간 부담스럽고 힘든 것이 아닙니다. 풍성한 교회의 한 성도는 제게 '너는 그것들 다 지키지도 않잖아.' 이렇게 제게 말씀을 하시지만, 저는 20대 초반에 에베소교회에서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에게 한 점 부끄럼 없기 위해서, 정말 저의 모든 삶을 헌신하며 사역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교회에서 제게 요구하는 것들을 다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풍성한 교회에서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지켜야 할 규칙들을 책으로까지 만들어 놓아, 너무 많은 것을 권면하고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이미 일주일 중 상당한 부분을 교회 생활에서 쓰는 가운데에서도, 저는 계속해서 교회의 많은 요구사항들을 지킬 것을 예배시간 말씀을 통해서 주변 성도들을 통해서 권면 받습니다.
종교생활은 기쁨과 자발적인 헌신 없이는, 정말로 지치고 피곤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당근을 주고 채찍질을 하며, 끊임없이 성경의 체재와 교리, 각 교회의 체재와 교리를 따르도록 사람들을 세뇌시킵니다. 세뇌란 것은 어떤 사상이나 주의, 신념 등을 머릿속에 주입하거나 또는 받아들이도록 설득하여, 본래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행동을 개조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크리스찬이다.
11. 나는 인격신인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신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크리스찬이다. 그러나 나는 종교화된 기독교를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니다. 위 두 사실에서 비롯된 수많은 체재와 교리들. 나는 그러한 것들을 믿고 따르고 싶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의 정체성은 다음과 같다. 나는 먼저는 기도자이다, 그리고 나는 크리스찬이다. 그러므로 기도 뿐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얻는다.
종교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수단이지, 그 자체로 하나님이 아니다.
12.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어졌다. 하나님은 이 모든 존재를 포괄하는 것이며, 동시에 모든 존재들은 서로 분리가 되어 제각기 다른 형상을 지닌 채 살아간다. 어떤 종교의 어떤 경전이든, 하나님의 모습을 온전히 담지도 보여주지도 못한다. 어떤 경전의 체재와 교리에 통달하여,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모습을 더 잘 아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때,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모습을 더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다.
13.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에서 성부 하나님 아버지, 성자 예수님, 성령님은 하나이다. 성령님은 하나님과 사람을 잇는 매개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를 통하여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성부의 독생자로서 성부와 영원한 관계에 있다는 것과, 성령도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 역시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삼위일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본래 하나님이었고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고자, 김태양으로 태어난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떠한가? 다른 사람들 역시 나와 같이 스스로 선택하여, 태어나고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믿고 받아들이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자들이 있다.
그러나 나의 삶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일반 20대 청년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비범할 것 없는 평범한 모습이다. 그러나 내가, 그리고 하나님이 진실로 말하건대, 우리에게 주어진 개개인의 삶은 그저 평범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비범한 것이며, 우리가 태어나고, 존재하고, 살아가는 그 자체가 신비이며 기적인 것이다. 바다를 가르거나, 물위를 걸어 다니거나, 병자를 치유하는 것이 진정한 기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자기 자신이 부처임을 깨달으라는 말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되었으며, 우리가 태어나기이전, 하나님이었고, 스스로 선택해서 무지하고 죄 많은 인간으로 태어났고, 그리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이며,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진실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과 하나임을 깨닫고, 우리자신이 곧 하나님임을 깨달으며, 거룩한 사랑의 삶을 살기에 힘써야한다.
전하기
14. 김태양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기도를 통해 깨달은 이 말씀을 믿고 전하고자하는 자들은 이 말씀을 받아들일만한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 전해주길 바라는 바입니다.
(2018-04-17)
기도자로서의 삶
기도자란 무엇인가?
1. 창조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기도를 통해 응답하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이다.
기독교의 성경과 교회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2.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자들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말씀을 받고, 또 그 말씀에 순종한 삶을 기록한 책이다.
3. 예수그리스도는 구약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 그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율법의 틀을 깨버리고, 안식일 날 병자를 치유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율법보다도 더 위에 있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맺은 일대일의 인격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율법 너머에 있는 진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오신 것이라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맺은 인격적인 관계는 성경 너머에 있는 것이다.
4.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성경의 많은 비과학적인 요소들, 시대에 맞지 않는 율법들로 인해서 성경은 그 권위가 점점 쇠퇴하고 있다. 성경은 이천년 전에 완성된 책이고 그 시작점은 그보다 더 오래 되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인식수준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날 사람들과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예수는 성경의 체재와 율법을 넘어서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일대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바랐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곧 나인 그 경지까지 이르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도그마(생각의 결과물)을 뛰어넘어 하나님과 진정으로 일대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길 바랐지만, 그의 삶과 가르침은 성경의 신약이 되고, 종교화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람들이 또 다시 그 체재와 율법에 속박되게 만들었다.
5.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의 대다수의 인식수준이 중세시대에 머물러 있다. 그 이유는 성경의 권위가 서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서게 되고, 그런 성경의 말씀들을 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인식수준이 최소 이천년 전이라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한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과학지식도 전무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크리스찬은 오늘날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과 일대일의 바른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해서, 세상에 대한 인식수준마저 이천년 전으로 가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6.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것은, 성경의 구약시절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인격적인 관계가 완전하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 곧 사랑을 따라 우리 인간을 지으셨다. 우리는 모두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백히 기억하고 믿어야 한다. “나는 태어나기 이전 하나님, 곧 완전한 존재였다.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고자, 스스로 선택하여, 이 지상위의 인간인 나로 태어났다. 곧 하나님인 나는, 스스로 선택하여 지상 위 인간인 나로 태어났고, 천상의 나와 지상의 나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길 원하신 것이다. 인간은 무지하고 불완전하여 죄를 짓기 쉽다. 그래서 각 사람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기도를 하고, 기도를 통해 응답하신 율법을 마음에 새겨, 이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자의 삶이며,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며 우리에게 전하신 바이다.
7. 그러나 오늘날의 성경에 대한 해석과, 교회의 가르침은 이런 진실과 멀리 동떨어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위상을 갖고 있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 교회에 종속된 노예가 되는 삶을 전하고 가르치고 있다.
8.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었고, 그리하여 성경 너머에 있는 하나님과 일대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으셨다, 성경 구약의 체재와 율법을 뛰어넘는 진실을 마주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 진실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쳐 스스로 십자가를 감당하신 것이다. 나 역시 성경의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하나님,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었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 이러한 진실을 마주한 것이다.
9.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자기와 같은 위상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전하고자 하였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격이 된 예수님을 우상화하여,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시키고, 성경에 나와 있는 체재와 율법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를 맺고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기도자의 삶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은 구약시대의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일대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하나님과 예수님이 맺으신 관계, 그리고 그 밖의 신약과 구약의 인물들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 그 관계들을 우상화 하여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정체성을 찾으려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인은 성경과 자신이 속한 교회의 체재와 율법을 깨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보다 완전하게 전하는 것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과 사람들의 인격적인 관계를 우상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나 자신이 올바른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 라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이런 가르침을 전하는 교회는 지금 이 글을 기록하는 이 시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10.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것은 이것을 어떻게 해석 하느냐에 따라 틀린 말이 되기도 하고, 맞는 말이 되기도 한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이것의 참의미를 깨닫는 자라면, 이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 왜곡된 의미를 가진 자라면 그것은 틀린 말이다. 오늘날 이 말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무신론자, 불가지론자들을 배척하고 겁주기 위한 말로 쓰이고 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스스로가 부처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부처는 진리를 깨달은 성인이다. 예수님 이외에도 구원의 길은 있다. 명상을 통해서도, 기타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의 길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구원의 길에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진실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타종교를 배척하기 위해서 쓰여야 할 말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진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쓰여야 할 말인 것이다.
11. “교회를 떠난 자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떠난 자이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상황이 있는 법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교회와 성경에 관한 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일에 관하여서도 뜻을 주신다. 그것은 사업일 수도 있고, 학문 그 밖의 여러 가지 일수도 있다. 스스로 크리스찬임을 고백하고 교회를 다니지 않은 수년간 나는 틈틈이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나의 삶을 살아갔다. 교회는 떠났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을 떠나진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교회의 정통적인 가치관으로는 용납도 인정도 되지 않는 신앙이다. 그럼에도 각 교회는 교회를 떠나서 자신의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크리스찬들에 대해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들 중에는 때가 되면 다시 교회로 돌아오거나 혹은, 자신의 교회를 세워 사역을 감당할 자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를 떠나며,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까지 저버린 자는 진실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떠난 자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기쁨으로 전하는 것이지, 그것이 의무이고 강제 되어야 할 사항은 아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사명을 받지 못한 자들은 크리스찬일지라 하더라도, 단지 자신의 신앙만 지키며 하나님과 자신이 맺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기쁨이 되는 다른 일들에 몰두하며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과 맺는 인격적인 관계의 기쁨이 단순히 개인의 신앙으로만 맥이 끊어진다면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므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자라면, 그것을 전하는 것에 자신의 모든 삶, 생명까지도 바치며 헌신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뻐하지만, 그것을 전하는 것에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을 비난해서도 종용해서도 안 된다. 그럴수록 그들은 교회로부터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다.
12. 오늘날의 기독교가 불완전함에도 이렇게 계승되고 전파되는 이유는, 그것이 비록 불완전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기쁨과 낙이 있기 때문이다.
13. 십일조에 대해서, 교회는 신앙 공동체이지, 사업기관이 아니다. 성도들의 헌신 없이 교회는 존립할 수 없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교회에 십일조를 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전혀 기쁘지 않은데 하나님이 기뻐하시길 바라기 때문에 교회에 십일조를 낼 수는 없다. 성경을 통해서, 또 교회를 통해서 맺은 하나님,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내가 기쁨을 누리고, 이 복음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 전해지길 바라기 때문에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다. 즉, 하나님으로 인해 내가 기쁘기 때문에 교회에 십일조를 내는 것이다. 그 이외의 각종 헌금,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 이유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는 십일조, 헌금, 사역을 감당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들이라며 정죄한다. 그보다는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기쁨을 누리고 있지만 십일조, 헌금, 사역을 감당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누리며 기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사명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 자들이다.
14. 교회 내의 영적권위에 대해서, 대한민국의 장로교는 담임목사에게 주께 대하듯 순종하라고 한다. 담임목사님이 하나님,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교회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목사님께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나는 20살에 부산의 에베소 교회에 전도되어 그곳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담임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목사님께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란 가르침에 믿음이 있었고, 또 이 가르침에 대한 기도응답을 받아 이런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었다.
목사님께 순종하는 삶에는 신앙적인 성장도 있고, 기쁨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에서부터,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맺은 인격적인 관계는 뒷전이 되고, 목사님과 하나님과 맺은 인격적인 관계가 최우선이 되어, 나는 점점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한 확신을 잃어가고, 목사님과 하나님이 맺은 관계에 종속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하나님과 일대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확신을 얻었었지만 성경이나 교회의 정통적인 가치관을 벗어난 나의 꿈과 가치관들은 모두 부정당하고, 나는 점점 주체적인 삶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정체성에도 혼란을 겪으며, 극심한 우울증을 겪어야 했었다. 담임목사님에게 순종하여서 나는 담임목사님이 하나님, 예수님과 어떤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계시다는걸 알게 되었고, 그러한 신앙에 대한 본질과 형식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이 하나님, 예수님과 맺은 인격적 관계에 대한 확신을 잃어갔다. 나의 기도응답과 확신, 그리고 목사님의 기도응답과 확신 사이에는 불일치가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고, 담임목사님을 주께 대하듯 순종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이었다. 목사님께 주께 대하듯 순종하는 자세에서, 얻는 것도 있지만, 잃는 것도 있다. 기도응답이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또 다시 기도응답이 있다면, 그것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목사님을 존경하며, 따른다는 것과 목사님께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은, 비슷한 이야기 같으면서도, 질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인 것이다.
목사님을 존경하며, 따른다는 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주체적인 삶을 유지한 채 믿음이 될 때 목사님께 순종하며 따르는 것이지만, 목사님께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는 건, 주인 되지 못하고, 종 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가치관이 자리 잡은 곳에서, 목사님을 주께 대하듯 순종하지 못하는 자는 결국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유인의 삶을 준 것이지, 종 된 삶을 살라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 자유를 가르친 교회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사님을 대하길 주께 대하듯 하라.’ 슬로건은 이제 교회에서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목사님을 영적 스승으로 믿고 따른다.’가 맞는 것이다. 주께 순종하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이지, 담임 목사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님을 영적 스승으로 믿고 따르는 것만으로도, 목사님과 주님이 맺은 인격적 관계에 대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목사님을 주께 대하듯 순종하라 이것은 아직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여물지 못하여 기도를 통해 하나님,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응답도 받지 못하는 자들에게 자에게 권유할 수 있는 사항이지, 신앙이 성장했는데도, 교회에서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세뇌해야 할 사항은 아니다.
15. 하나님의 나라,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서 크리스찬은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우리 곁에 와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야 할 자세인 것이다. 그것은 이 땅에서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을 살아가며 훈련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 제일가는 것은 사랑이다. 우리의 영은 영원하며 영생한다. 이 지상에서의 삶은 영원에 비해서 찰나와도 같은 것이다. 이 세상의 것들에 현혹되지 말고, 영원한 것을 영원히 바라며 살아가야한다.
기도자의 세상에 대한 꿈과 목표들에 관해서.
16. 꿈은 나 자신이 정말 간절히 이루고자 하는 목표이다. 그리고 목표는, 꿈을 이루기 위한 세부적인 일들, 그 밖에 살아가면서 감당하여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이다.
17. 꿈과 목표들이, 꼭 성경의 가르침을 전하여야 한다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만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 사이에 기쁨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좋다. 사업, 학문, 예술 그 밖의 모든 것들. 그것은 나 자신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면 좋고, 나 자신이 기쁘고, 다른 사람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면 더욱이 좋다. 그러나 단, 나와 다른 사람을 해치고, 죄를 짓는 일이면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의 하나님은 다 다른 듯 보여도, 결국 같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모든 영들은 서로 연결 되어있는 것이다. 남을 해치면서, 또 나 자신을 해치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18. 수학의 진리 하나를 파헤치기에도, 한 인간의 전 생애를 다 바쳐도 모자랄 수 있다.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 휴일까지 반납해가며, 밤낮없이 몰두해도 그것이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 만만치 않은 것이다.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감히 도전할 수 없는 목표들도 있다. 기도자는 기도를 통해서, 꿈과 목표를 얻는다. 꿈이라는 것은 하나일 수 도 여럿일 수 도 있다. 선한 목표를 선하게 이루어가야 한다. 악한 목표는 애초에 설정해서도 안 되는 것이며, 선한 목표를 악하게 이루어 나가는 것 역시 악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어졌고, 사랑의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영적전쟁이다. 선과 악의 전쟁이다. 어떤 꿈과 목표를 이룬다는 것도 하나의 영적전쟁인 것이다. 인간의 능력과 의지만으로는 이 모든 것을 감당 할 수 없다. 이런 영적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를 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감당하실 능력과 지혜를 주신다.
19. 꿈과 목표를 이루는 것에 집착하면 안 된다. 그것을 이루냐, 못 이루냐로 우리 자신을 판단해서도, 자학해서도 안 된다. 꿈과 목표에 집착해서 설사 그것을 이룬다 하더라도 남는 것은 허무와 공허뿐이다. 꿈과 목표가 우리에게 소중하고 가치 있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도전하는 자에게 시련이 오는 법이고, 시련이 오면 우리는 기도를 한다. 꿈과 목표를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이다. 그래서 나 자신의 능력으로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목표라 할지라도 기도자에게는 엄청난 가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시고 교제하신다.
인간관계에 대해서
20. 하나님은 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고 사랑해주신다. 그리고 나의 기분, 감정, 생각을 배려하고 대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은혜가 되고 기쁜 것이다.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도 그리해야한다. 타인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고 사랑해주어야 한다. 타인의 기분, 감정, 생각을 배려하고 대해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안다, 이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서로의 가치관이나 믿음의 체계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종교, 정치적 논쟁은 죽마고우도 철천지원수로 만들어 버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쟁도, 국가와 국가 사이의 분쟁도, 종교와 종교 사이의 분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가치관, 믿음 체계를 이해하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내 시각에서 그것이 불합리하게 보이고, 오류투성이로 보일지라도,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고 사랑해주어야 한다. 자신의 가치관과 믿음 체계를 권유할 순 있어도 강제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옳고 완전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상대에게 강제하는 순간, 서로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영혼이라는 것은 매우 연약하고 깨지기가 쉽다. 아무리 완고하고, 감정이 없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내면에는 연약하고 보살핌이 필요한 아기가 살고 있다.
인간과의 관계, 그 모든 일에 있어서도, 기도자는 늘 기도를 하며, 능력과 지혜를 얻고 이상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한다. 이상적인 관계라는 것은 굉장한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뜻이 있는 만큼, 믿음이 있는 만큼 관계에 힘을 쓰는 것이 좋다.
21.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행복해 하면, 나도 행복해 진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불행해 하면, 나도 불행해 진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영이 이어져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기뻐하는 자는, 다른 사람과의 영적 고리도, 하나님과의 영적 고리도 끊어져 있는 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우리의 모든 영적 고리가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22. 우리는 모두 하나이다.
높은 정신차원의 세계
23. 높은 정신차원의 세계에서, 모든 과학, 철학, 종교는 한 곳에서 만난다. 인간이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갈등을 겪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유는, 우리가 영적으로 완전하지 못하며, 낮은 정신차원의 세계에서 머물러, 그 시야가 편협하고 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과학, 철학, 종교는 그 모두가 진리를 추구한다는 점에 있어서 동일하다. 진리라는 것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부패한다. 왜냐하면 진리라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 그 자체이며, 완성된 진리에는 그보다 더 큰 진리가 설자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끝마치며
24.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기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나 김태양은 이것으로 기도자의 삶에 대해 기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기술하였다. 누군가는 나를 비웃을 것이며, 누군가는 나를 정신병자로 여길 것이며, 누군가는 나를 깨달은 자로 여길 것이다. 이것을 완전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며, 이 깨달음을 기록한 시점은 28살로, 언제까지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나도 이제 정착할 때가 되어 이 깨달음들로 여생을 지내려고 한다. 끝없는 진리추구는 사람으로 하여금 끝없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게한다. 하나님은 내게 이제 신앙적인 나의 정체성은 여기 이 자리에 안주하도록 허락하셨다.
나는 크리스찬으로서 기독교의 성경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으로 여기고, 이 말씀들 또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으로 믿으며 살아갈 것이다. 내게는 이 깨달음을 세상에 전할 사명도 뜻도 없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바른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자들은 이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혹, 이 깨달음을 받아들일만한 믿음이 있는 자들이 보인다면 이 말씀을 전해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얻은 이 깨달음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도 누리게 하고자 함이다.
이 말씀들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는, 다른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도 전해주길 바라는 바이며, 부분적으로 믿고 부분적으로 믿지 않는 자는 그 믿음의 분량에 맞게 지혜를 더할 것이며, 이 모든 것을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겠는 자는, 나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위해를 가하지 않고 사랑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품어주길 바라는 바입니다.